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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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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러닝타임 345분. 약 4시간.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살풍경한 이야기. 사랑도 희망도 없는 비참한 시간을 놔두고, 이것이 답이라는 듯이 자살한 이 영화의 감독. 거기에 이르고보니, 마치 감독의 자살은 화룡정점. 이런 영화를 만든 사람의 결말다운 끝이구나. 새벽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나 역시 아무도 찾을 수 없을 때에, 아 그냥 땅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싶다 할 때에, 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때에 무심히 눈물 한 점 고이지 않는 마른 눈으로 보게 되는 영화. 호흡도 무척 길고, 스토리에 비해 대사가 극히 적은데도 대사가 굉장히 좋다. 너같은 건 아무데나 가서 길거리에서 꼬치나 팔며 살거라는 선생님의 말에 위예부가 "선생님은 잘 살 거라는 거 확실해요?" 라고 묻는 것. 전여친에게 "끈질기네.. 2020. 6. 29.
포기하는 마음 한달 반 전에 잘해보고자 했던 일을 포기했다. 일에 대한 욕심에서는 자존심이 너무 컸고, 사람에 대해서는 기대고자 함이 너무 컸고 비판에 나약했다. 나는 마음에 큰 상처가 나기 전에, 모멸감에 휩싸여,뒤돌아볼 새도 없이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사람을 미워하는 일에는 에너지나 열정이 필요하므로, 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나를 미워했다. 시스템이 이상해, 사람들이 모두 못됐어, 이런 가치없는 일로 내 마음이 꺾여선 안돼, 다들 무능력해, 나를 알아주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된거지, 아니 거기 정말 이상하다니깐? 하지만 언제나 그 끝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내가 너무 예민했나? 나는 왜 이 정도도 못 견뎌? 결국 나는 진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이겨내지 못하지 않았나. 다 .. 2020. 6. 18.
컨설턴트/임성순 「스탈린과의 권력싸움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도망친다. 역사가들은 온건한 합리주의자였던 그가 집권했다면 소비에트 연방과 공산주의의 미래는 제법 달라졌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라이벌에 비해서 충분히 비겁하지도, 냉혹하지도 못했다. 삶은 참 모호한 것이어서 결정적 순간에 한 인간이 지닌 인간적인 장점이 그를 몰락시킨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이 구절이 나오는 마태복음서보다 먼저 쓰인 누가복음서에서 같은 구절이 등장하는데 그 곳에서는 '심령'이 빠지고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적혀있다. 누가복음보다 나중에 나온 마태복음이 다른 이유는, 복음서를 적은 저자가 일하던 마태오 교회의 신자들이 대부분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가복음서를.. 2019. 12. 10.
소년 7의 고백 / 안보윤 1. 소년 7의 고백 성폭행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14세 소년이 진술조사를 받으면서 독백식으로 이야기하는 구조. 불우한 환경에서 '여긴 원래 다 그렇다.'며 특별한 죄의식없이 처벌에 대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는 소년의 특성이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별 생각없이 그냥 지금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이유로 경찰의 의도대로 거짓진술을 한다. 소년의 무지한 악의는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해도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도덕의 부재다. 경찰의 고의적인 악의와 소년의 무지한 악의가 만난 뒷맛이 쓴 단편. 2. 포스트잇 한 청년이 아버지에게 길바닥에서 무참히 살해된 소녀를 위해 마련된 버스정류장 추모 포스트잇에서 끔찍한 욕설이 담긴 포스트잇을 떼려다가 그 모습이 우연히 기자에게 찍히면서 오해를 .. 2019. 12. 9.
행복했던 동백꽃 필 무렵 안녕 1년에 드라마를 두세편 볼까말까 인데다 그나마도 끝까지 보는 일은 정말 드문데 올해는 딱 두 편을 완벽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상반기는 열혈사제, 후반기는 동백꽃. 올해 나온 드라마 중 딱 두 개 봤는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아 좋았다. 나도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고, 친구랑 단막극 공모도 두어번 냈었는데 동백꽃을 보고나니 정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이었는지;; 전개에 있어 아쉬운 부분은 있었지만...(그것도 정말 쥐똥만한 수준일 뿐) 대사가 대사가...어쩜 저렇게 쓰나. 감탄을 너무 많이 해서 하나만 꼽을 수도 없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가 저만한 인간과 관계에 대한 깊이와 통찰력이 있는데, 내가 부빌 세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극본을 소름돋게 연기했던 두 배우에게도 완전 빠.. 2019. 11. 25.
이럴땐 널 생각해. 로제타 세상엔 참 어차피 태어난 거 잘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은데, 아주 훌륭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겠으면 자신에겐 이기적이어도 남에겐 이타적이었으면 좋겠건만, 거미줄을 치면 자기만 거미줄에 엉키는게 아니다. 나는 비록 아주 착하지도 않고 나날이 못되지는 거 같고, 아주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고 남을 위해 별로 희생하진 않지만 가능하면 내 인생 정도는 책임지고 그냥 더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그림자처럼, 어느날 이상할 것도 없이 스르륵 사라지는 그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자꾸 거미줄에 걸리고 시궁창에 빨려들어가고 강가에서 손이 쑥 올라와 발목을 잡아끈다. 그렇다고 혼자 죽으라고 할 용기는 없고 그냥 다들 나처럼 해결책이 없을 땐 우선 참고 살면 좋을텐데. 그게 안.. 2019. 11. 12.
원에게 (신기섭) (가장)좋아하는 시 (중 하나) 원에게 / 신기섭 너도 나를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때 이러한 의심을 했다 갖은 노래와 농담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것: 때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나는 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애인에게 사과를 깎아주는 너무도 순한 처녀처럼 혹은 다 큰 자식들뿐인 집의 새엄마처럼 칼을 쥐고 떨어야만 한다는 걸. 떨림: 언제나 내 부족함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미워진 사람은 어떠한 추억을 막론하고 끝까지 미워하는, 나의 기질은 변함이 없다 사랑하는 일보다 미워하는 일의 떨림 ((떨림)) 내가 오백년전 프랑스의 궁중악사였음을 확인한 전생체험. 그때 나는 지루한 궁전을 탈출한 죄로 사형당했다. 수많은 횃불들이 내 몸을 더럽혔지만 나를 위해 .. 2019. 11. 12.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대다수가 초중고등학생때 본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그 때가 영화를 제일 좋아했을 때고 지금은 그냥 가끔, 남들 보는만큼 본다. 영화를 정말 좋아했을 땐 왠만한 영화들은 다 의무감때문에라도 보고 그랬다. 아는 척도 하고 싶었고 그만큼 알고도 싶었다. 근데 영화를 좋아하고 너무 많이 보고 난 후엔 영화를 엄청 가려서 보게 되었고 그러다가 점점 안보게 되었다. 이 감독은 이래서 별로고, 저 배우는 저래서 싫고 이건 사람들이 별로랬으니까 싫고..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는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의미있지 싶어지기도 했다. 예전엔 별다른 정보나 기대없이도 엄청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에 늘 와, 이런 영화가 있구나 하는 설레임을 주는 영화를 만나곤 했는데 영화를 가려보게 된 뒤론 그런 일이 없어진 거.. 2019. 11. 12.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그저 도시락이지만. 도시락이되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 그것을 맛 본 경험이, 그런 것을 꾸준하게 맛볼 기회가 나나와 내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요즘도 골똘하게 생각해볼 때가 있다.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가정하고 생각해보는 것은 조금 두렵다. 순자씨는 그 도시락으로 나나와 내 뼈를 키웠으니까. 그게 빠져나간 뼈란 보잘것없을 것이다. 구조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허전하고 보잘 것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단하지 않아? 보잘것없을 게 뻔한 것을 보잘것없지 않도록 길러낸 것. 무엇보다도 나나와 내가 오로지 애자의 세계만 맛보고 자라지는 않도록 해준 것. 그게 그녀의 도시락이었어. 다만 도시락. 그뿐이었고 그 정도나 되었으므로 대단히 대단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태어나길 잘했.. 2019. 11. 12.